『 긍휼의 법과 감사의 계절 』

2011 11 6 황상하 목사의 신앙덕담

 

긍휼의 법과 감사의 계절

 

흔히 구약의 율법을 연구할 제의법과 도덕법과 시민법으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제의법은 신상 제작을 금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각종 제사에 관계된 규례이고, 도덕법의 핵심은 진실 증언을 하도록 하는 것이며, 시민법은 약자를 배려하라는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약자에 대한 배려를 명한 율법을 긍휼의 법이라고 합니다. 긍휼의 법이란 엄격한 법률적 의미에서 법이라고 간주할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모든 율법 안에는 온정적 취지의 도덕적 원칙들이 포함되어 있고 원칙들은 신학적 동기에서 출발하여 실천적 목적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긍휼의 법이 취급하는 구체적인 상황들은 매우 폭이 넓고 인상적입니다. 법의 수혜자들은 약자들인데, 특히 가족과 토지라는 자연적 보호 장치가 없는 과부, 고아, 레위인, 이주자, 체류자 등이 이에 포함됩니다. 긍휼의 법이 약자들을 배려하려는 목적에서 주어졌지만 정의와 질서를 어겨가면서까지 약자들을 배려하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약자들이라도 법을 어겼을 경우 엄격한 처벌을 받도록 하였습니다. 약자나 강자 모두는 앞에 평등합니다. 그런데 약자를 긍휼히 여기는 것은 법률로 규제할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긍휼의 법이 있지만 그것을 어겼다고 하여 처벌할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긍휼의 법을 거의 모든 상황에서 실천하도록 명하셨습니다. 법이 불편부당하게 집행되어야 것을 명한 것도 사실 약한 자에 대한 배려이고, 추수 때에 감사의 즐거움에 앞서 약자를 배려할 것을 명하였고, 비록 적군이라고 할지라도 사람과 그들의 재산을 존중할 것을 명한 것도 긍휼의 법이며, 채무자라고 할지라도 그의 인격과 재산을 세심하게 배려하며, 이주민과 낯선 객을 특별히 보살피고, 장애자들을 사려 깊게 돌보며, 일군의 품삯을 신속하게 지급하고, 약자의 물건을 담보로 취할 형편을 고려하여 취하고, 신혼 초의 신랑에 배한 배려, 초상을 당한 사람에 대한 배려, 심지어 가축이나 야생 동물과 과실수에 대한 배려도 긍휼의 법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안에서 긍휼의 실천은 인도주의적 결과를 가져왔지만 기원과 동기는 신학적입니다. 성경의 긍휼의 법이 인도주의와 다른 것은 기원과 동기가 신학적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누구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언약적 헌신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헌신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위해 행하신 그분의 행위 가운데 계시되어 있는 그분의 성품을 반영해야만 합니다. 이스라엘인들이 그랬듯이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은 약자나 종살이 하는 자나 가난한 자를 향하여 긍휼의 법을 준수해야 의무가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내가 그러한 상황에 처했을 실제로 하나님이 나를 향해 취하셨던 행동 방식이 바로 긍휼의 법이었기 때문입니다.

11월은 감사의 달입니다. 비록 농사를 짓지 않는 산업사회의 도시 근로자라고 할지라도 동안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하는 계절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믿고 감사하는 계절에 특히 잊기 쉬운 것이 긍휼의 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감사의 마음에 들떠 긍휼의 법을 잊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나라를 주신 것에 감사할 나라 없는 사람을 기억해야 하고, 가정을 주신 것에 감사할 가정 없는 사람을 기억해야 하고, 배불리 먹을 음식을 주신 것에 감사할 배고픈 이웃을 기억해야 하고, 건강 주신 것을 감사할 병든 이들을 기억해야 하고, 안전하고 평안하게 지내 것을 감사할 재난과 전쟁으로 인하여 고통당하는 자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약자를 배려하는 긍휼의 법을 실천하는 것은 마음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물질만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약자를 불쌍히 여기는 긍휼의 마음에 따라 손을 펴는 것은 인도주의자들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긍휼의 법을 지킬 결과는 인도주의가 될지라도 기원과 동기는 철저히 신학적이 되어야 합니다. 약자를 배려하는 긍휼의 법은 나를 배려하신 하나님의 법이며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조건 없이 사랑해 주셨기 때문에 나도 다른 사람을 조건 없이 사랑해야 하는데, 특히 약한 자를 사랑해야 합니다. 약자를 사랑하여 긍휼의 법을 실천하는 감사의 달이 되었으면 합니다.

너는 객이나 고아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지 말며 과부의 옷을 전당 잡지 말라. 너는 애굽에서 되었던 일과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거기서 속량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 네가 밭에서 곡식을 때에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하나님 여호와께서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네가 감람나무를 후에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며 네가 포도원의 포도를 후에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너는 애굽 땅에서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 - 24:17-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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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seph1952 | 2011/11/10 06:07 | 2011년 신앙덕담 | 트랙백 | 덧글(3)

『 모자람은 불편하고 풍요는 위험하다 』

 

20111030일 황상하 목사의 신앙덕담

 

모자람은 불편하고 풍요는 위험하다

 

어린 시절 옛 농촌에서의 잊히지 않는 기억 중의 하나는 배고픔입니다. 옛 농촌의 겨울은 춥고 배고픔이 만들어 낸 추억이 많습니다. 수수 대를 세워 그 위에 흙을 덧칠한 벽으로 겨울 송곳 바람이 숭숭 들어와 위목에 물 사발을 꽁꽁 얼게 하는 겨울 밤, 모자라는 이불을 서로 당겨 덮느라 잠을 설쳤고, 어린 형제들은 천정을 향해 고무신처럼 나란히 누워 입김을 후후 불며 장난을 치다가 배가 고파 날 고구마나 무를 깎아 먹고 잠이 들곤 하였습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호롱 불 주위에 모여 내복을 벗어 뒤집어 솔깃 사이에 숨어 있는 이를 잡는 것도 나름대로 재미있었습니다. 이는 잡아 호롱 속 석유에 빠뜨리고 시가리(이의 알의 지방방언)는 불에 태웠는데, 태울 때 나는 토독 토독 소리 또한 재미있었습니다. 밤중에 오줌이 마려워 일어났다 돌아오면 자리가 없어져 잠자리를 개척해야 했습니다. 아침에 어머니가 밥을 풀 때는 제비 새끼들처럼 샛문으로 내다보며 엄마, 쌀밥 쌀밥, 좀 마이 마이라고 하지만 쌀밥은 할아버지, 아버지, 아기, 형 밥을 푸고 나면 나머지는 모두 섞어버리기 때문에 소용없는 줄 알지만 늘 그렇게 하곤 했습니다. 어쩌다 할아버지와 겸상을 할 때도 있지만 김이나 생선 구운 것은 할아버지가 집어 주시면 행운이었고 그렇지 않으면 그림의 떡이었습니다. 그것이 당연한 것이었기 때문에 김 한 장 못 얻어먹어도(먹고 싶기야 했겠지만) 서운한 것도 몰랐습니다. 늘 배는 고파 있었고, 입는 옷, 신는 양말이나 신발도 떨어진 것을 두 번 세 번씩 기워 입고 신었습니다. 무엇 하나 풍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식량이 모자라고, 땔감이 모자라고, 입을 옷도 부족하고, 잠자리, 이부자리 모두가 부족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부족해도 도둑질 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잠언 기자가 염려했던 극단적인 가난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극단적 가난을 불편함이라고 하면 안 되지만 그 시대의 대다수의 사람들은 모자람으로 인한 불편함을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모자람이나 불편함 때문에 비윤리적이 되거나 비양심적이 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 가난하고 모든 것이 모자라던 시대에도 시골 인심은 훈훈했었는데 보릿고개가 극복되고 시골 형편이 나아지면서 인심이 사나워 진 것을 생각할 때 모든 것이 모자라는 가난이 나쁜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한국의 근대사에서 볼 때 전통적인 농경 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이동하면서 경제적 형편은 나아졌지만 보편 가치들은 점점 무시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물론 민주의식이 발전하면서 인간의 기본권과 어린이와 여자들의 권익도 신장되었습니다. 지게나 우마차나 삽과 괭이로 하던 일을 경운기나 트랙터가 대신하여 사람들의 고된 노동을 덜어 준 것 또한 농사일 노동의 고달픔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 고마움을 다 모를 것입니다. 자동차의 발전과 수를 다 헤아릴 수 없는 가전제품들은 노동의 수고와 불편함을 덜어주었습니다. 인간 복지를 위한 긍정적인 수많은 발전과 기여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현대문명과 자본주의는 인간 소외도 심화시켰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본주의를 신봉하는 어떤 사업가가 자기 밑에서 일하는 직원에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여기 금덩어리 다섯 개가 있다. 내가 두 개를 가져왔다. 몇 개 남았냐? 세 개요. 내가 또 한 개를 뺏어왔다. 몇 개 남았냐? 두 개요. 그래, 이게 자본주의야. 내가 안 뺏어오면 다른 놈이 빼앗아 가는 거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먼저 가져가는 놈이 임자야. 사람들이 말로는 돈이 뭐 그리 중요하냐고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야. 세상에 돈보다 중요한 건 없어.” 자본주의의 폐단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요즘 도가니라는 소설이 베스트셀러입니다. 작가 공지영씨가 그 책에서 한 이야기입니다. 가진 자가 자기가 가진 것을 빼앗길까 두려워하는 에너지는, 가지지 못한 자가 그것을 빼앗고 싶어 하는 에너지의 두 배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가진 자는 가진 것의 쾌락과 가지지 못한 것의 공포 둘 다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진 자는 가진 것이 많을수록 그것을 빼앗으려고 하는 자에게 가하는 폭력이 무차별적이고 잔인하다고 하였습니다.

옛날에는 가난하여 도둑질 할 위험이 있었지만, 오늘날은 가난하여 도둑질 할 위험보다 배불러서 도둑질 할 위험이 훨씬 더 높습니다. 가난한 자는 돈에 대한 위력을 사실 잘 모릅니다. 옛날에 어린아이들에게 너 돈 있으면 뭐 할래?’라고 물으면 사탕 사 먹을래요.’, ‘아이스크림 사 먹을래요.’라고 하였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돈 생기면 무엇하고 싶은지 모르겠습니다. 게임기를 사고 싶은 아이도 있겠고, 스마트폰을 사고 싶은 아이도 있을 것입니다. 어쨌건 아이는 옛날 아이나 현대 아이나 그 욕구가 단순합니다. 마찬가지로 가난한 사람의 욕구는 부자에 비해 매우 단순합니다. 양식 걱정 안 할 만큼만 돈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겨울에 따뜻하게 지낼 수 있는 난방비용 걱정 안 할 만큼만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여유가 있으면 집도 사고 싶고, 자동차도 사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들의 생각은 다릅니다. 부자들은 돈을 더 갖고 싶어 합니다. 왜냐하면 돈의 위력을 알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자는 돈으로 무엇을 살 수 있기 때문에 돈을 벌고 싶지만, 부자는 돈의 위력을 알기 때문에 돈을 더 가지려고 합니다. 돈을 더 가지고 싶은 욕구가 얼마나 강한지 가난한 자의 돈이라도 빼앗고 싶어 합니다. 자기가 안 빼앗아 가면 어차피 다른 사람이 빼앗아갈 테니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먼저 빼앗아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빼앗는다는 말은 좀 극단적인 표현이기는 하지만 그게 부자들의 마음이고 자본주의의 폐단입니다. 부자의 욕심과 폭력은 비단 자본주의 사회가 아니더라도 고금을 막론하고 인간 사회 어디에서나 일어나는 일입니다. 성경에도 아합의 욕심과 폭력과 살인이 있고, 다윗도 욕심으로 폭력과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부자의 욕심과 폭력이 합법적이 되고 가난한 자의 억울함과 울분과 하소연은 위험한 사상으로 경계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부자들이 돈을 버는 것은 가난한자들을 상대로 버는 것입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가 경쟁을 하면 가난한 자는 거의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의 약점입니다. 자본주의의 이 약점을 가장 잘 이용하는 자들이 부자들입니다.

부하게 되는 비결은 성실하게 일해서 번 돈을 근검절약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발달한 사회에서는 성실한 노력만 가지고 부자가 되기란 사실상 어렵습니다. 노동 집약적인 고대사회에서는 성실하게 노력하고 근검절약 하는 사람이 부자가 될 수 있었지만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산업사회에서는 신속한 정보와 아이디어와 또 자본이 있어야 돈을 벌 수 있습니다. 재물 앞에 정치와 권력과 명예와 학문과 종교까지 머리를 조아리게 되었습니다. 재물 자체는 나쁘다거나 선하다고 할 수 없는 가치중립적인 것입니다. 재물은 하나님께서 그의 명령에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복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물이 많아 배부르게 되는 것 자체는 매우 위험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땅과 성읍과 집과 과수원과 먹어 배부르게 할 풍족한 양식을 주셨습니다. 그것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면서, 배부르게 된 이스라엘에게 그 배부르게 된 때 하나님을 잊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하였습니다. 풍요가 얼마나 위험한가를 일깨워 주시는 말씀입니다.

배고픈 사람은 도둑질을 해도 빵을 훔칩니다. 그러나 배부른 사람은 배고픈 사람을 죽이고 그가 가진 것을 빼앗습니다. 죄는 가난한 사람이 지은 죄나 부자가 지은 죄나 다 마찬가지이지만, 가난한 사람은 지은 죄 때문에 더 가난하게 되고, 부자는 지은 죄로 인하여 더 부자가 됩니다. 부자가 되어 위험한 것이 많지만 무엇보다 가장 위험한 것은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세상에서 도와 줄 사람이 없어서 하나님을 찾게 되고 부자는 돈이 모든 것을 해결 해 준다고 믿기 때문에 하나님의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돈 많고 배부르고 건강한 사람이 하나님을 찾을 가능성은 정말 희박합니다. 그러나 가난하고 배고프고 몸이 병들면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신자도 배부르면 하나님을 모른다고 할 가능성이 높고, 배고프면 하나님을 찾고 기도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개인이나 교회나 돈이 많으면 위험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살 때, 가난하고 힘들 때 조심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부하고 배부를 때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미국의 문제도 한국의 문제도 교회의 문제도 배부른 것입니다. 가난한 교회는 싸우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돈 많은 교회는 안 싸우는 교회가 거의 없습니다. 싸우는 교회들의 공통된 특징은 돈이나 재물이 많은 것입니다. 재물이 많고 배부르면 하나님을 잊어버릴 위험이 높기 때문에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염려입니다. 하나님께서 염려하신 일은 반드시 인간에게 일어납니다.

네게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6: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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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seph1952 | 2011/11/10 06:05 | 2011년 신앙덕담 | 트랙백 | 덧글(2)

『 양의 옷 입은 이리는 더 악하고 위험하다 』

 

 2011 10 23 황상하 목사의 신앙덕담

 

양의 입은 이리는 악하고 위험하다

 

마디의 거짓말과 번의 속임수도 나쁘지만 존재 자체를 위장하고 속이는 것은 나쁘고 악하고 폐해 또한 심각합니다. 동물로서의 이리는 양의 옷을 입고 남을 속이지 못합니다. 동물들이 먹이를 사냥하기 위해 사람이 보기에 속임수를 사용하는 같지만 그것은 생존을 위한 본능적인 행동일 도덕적이고 윤리적으로 악하다고 평가할 대상이 못됩니다. 악하다 혹은 선하다는 도덕적 평가는 사람의 행동에만 적용할 있습니다. 성경에도 악한 짐승이라는 표현이 있지만 그것은 동물이 악하다는 뜻이 아니고 악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양의 입은 이리라고 하신 것도 동물에 대한 도덕적 평가가 아니라 거짓 선지자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세상에도 양의 옷을 입은 이리 같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공지영씨의 도가니 실화를 소재로 소설로서 정말 양의 옷을 입은 이리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청각장애아들을 위한 자애학원 교장 이강석과 행정실장인 그의 쌍둥이 동생 이강복과 그들을 비호하는 생활지도교사 박보현 선생 등은 장애아들을 수년에 걸쳐 상습적으로 성폭행 해왔습니다. 새로 부임한 기간제 교사 강인호와 지역 인권센터에서 일하는 그의 대학 선배인 서유진에 의해 그들의 만행이 고발되었으나 경찰과 검찰, 변호사, 판사가 통속이 되어 야수 같은 그들을 비호하였습니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이강석이 장로로 시무하는 영광제일교회 교인들이 몰려와 선하고 좋은 일만 해온 이강석 장로님의 누명을 벗게 달라고 기도 아닌 기도로 시위를 하고, 교육청을 비롯하여 관할 행정 관청에서도 그들을 비호하고 오히려 고발자들을 불순한 자들로 몰아갔습니다. 장애학원 교장 형제는 아버지 때부터 대를 이어 청각장애아들을 위해 선한 일만 해온 좋은 사람들인데 사상이 불순하고 질이 나쁜 선생과 인권센터가 그들을 모함한다고 사람들은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이야 말로 양의 탈을 이리입니다. 소설 도가니 인해 소설 속의 자애학원은 재수사를 받게 되었고 국회에서는 그런 범죄를 방지하기 위한 특별법 제정을 논의하고 있다니 불행 다행입니다.

저축은행 비리를 저지른 자들도 양의 옷을 입은 이리이고, 양의 옷을 입고 있기 때문에 이리인지 없는 악하고 위험한 사람들이 사회에는 얼마든지 많을 것입니다. 세상에 양의 옷을 입은 이리가 많은 것도 위험하지만 교회 안에 양의 옷을 입은 이리는 위험합니다. 양의 옷을 입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위험한 몰라 피해가 큽니다.

내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강도사 고시를 해방신학에 대한 논문을 썼습니다. 해방신학은 WCC 운동을 배경으로 하여 생겨난 것입니다. 종교다원주의도 해방신학과 함께 WCC 운동이 낳은 결과라고 있습니다. WCC 운동은 교회 안에 자유주의와 실존주의와 은사주의와 신비주의와 사회구원론과 상대주의와 관용을 강조하는 포스트모더니즘까지 받아들여놓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WCC 그들의 목적을 달성한 셈입니다. 이제 서구의 교회들은 WCC 운동에 관심이 없습니다. WCC 교회연합과 선교와 교회의 사회참여의 기치를 들고 시작하였었습니다. 교회가 선교와 사회참여를 소홀히 그들의 주장은 상당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었습니다. 결과 교회의 사회 참여는 이미 해방신학을 통해서 한계를 드러냈고, 그들이 주장한 교회 연합은 WCC 아니더라도 종교다원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을 통해 주장되기 때문에 굳이 WCC 통해서 그런 운동을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운동을 주도했던 서구 교회들은 운동에 대해 식상해 있는데 한국교회가 운동에 목을 매는 것은 이해할 없는 일입니다. 한국 교회가 서구교회들에게는 식상해 버린 운동에 뒤늦게 뛰어드는 것은 교인수가 많아졌고 돈을 주체하지 못하기 때문인 밖에 다른 명분을 찾기 어렵습니다. 과거 WCC 주도했던 운동을 이제는 세상이 주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WCC 운동을 조심해야 하는 것은 그들이 채택하고 발표한 선언문과 입장은 그야말로 뿐입니다. 그들의 선언과 신학적 입장은 회원교회들에게 강제할 수도 없었고 강조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의 선언과 입장은 WCC 전통 교회의 바른 길에서 빗나간 것이라는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한 구실에 불과했습니다. 증거로 선언과 신학적 입장 표명에서는 복음주의와 비슷한 같이 놓고 구체적 활동에서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부인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선언과 신학적 입장과는 달리 기독교를 온갖 이방 종교와 대등하게 취급하여 활동을 왔습니다. 온갖 무속 종교와 샤머니즘과 자연종교에도 성령께서 역사하며 구원이 있다고 믿는 것으로 활동해 왔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유일성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유일성을 명시적이고 공개적으로 부인하지 않지만 활동에서는 부인합니다.

WCC 환영하는 교회와 목사는 WCC처럼 이중적이 되어서는 것입니다. 교리는 복음주의적인 것처럼 선언해 놓고 행동은 종교다원주의적으로 하는 것은 정직하지 못합니다. 목회는 복음주의적이고 개혁주의인 것처럼 하면서 활동은 종교다원주의적으로 하는 것은 교인을 기만 하는 것입니다. WCC 옳고 정당하다고 믿고 좋아하여 참여한다면 설교와 목회도 WCC 운동처럼 해야 것입니다. 다른 종교에도 성령께서 역사하고 구원 얻는 복음이 있다고 설교해야 것입니다. 그것을 믿지 못하고 그렇게 설교할 없다면 WCC 결별해야 것입니다. WCC 운동이 얼마나 교회를 망쳐 놓았는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WCC 그들의 운동으로 교회를 교회되게 한다고 했지만 결과는 교회의 사회와의 구별을 철폐하고 말았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들의 운동을 반대하던 복음적인 교회들에게까지 교회를 엔터테인먼트의 장으로 만들어가게 하였습니다. 양의 옷을 입은 이리는 양의 입지 않은 이리보다 악하고 위험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 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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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seph1952 | 2011/11/10 06:02 | 2011년 신앙덕담 | 트랙백 | 덧글(10)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


     2011
116일 주일 낮 설교

 

제목 :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

본문 : 시편 121:1-8

설교자 : 황상하 목사


    1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2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3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5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6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7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8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이 세상에서 아무 문제가 없는 곳은 딱 한곳뿐인데 그곳은 바로 공동묘지라고 합니다.

그 참 재미있는 말입니다. 사람이 살아 있는 한 문제를 피하여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웅변적으로 말해주는 이야기입니다. 죽으면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죽지 않고 살아 있는 동안에는 늘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이 그 문제에 대처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세상에는 문제에 대처하는 세 가지 타입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 문제에 말려드는 타입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문제가 발생하면 감당을 못하고 해결한다는 것이 오히려 문제를 더 크게 만들고 복잡하게 만듭니다. 누구나 그런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작은 문제를 크게 만드는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다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단은 그렇게 되는 것을 좋아합니다. 문제에 말려드는 것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모두가 조심해야 합니다. 부모 자식 간에도 부부 간에도 형제간에도 모든 인간관계에서 다툼과 갈등은 작은 문제를 크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둘째, 문제를 만나면 도망가는 타입입니다.

용기가 없으니까 도망을 갑니다. 도망가는 종류도 가지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술로 도망을 가고, 어떤 사람은 화를 내는 것으로 문제를 피하려고 합니다. 문제가 있는데 자기도 말을 안 하고 상대방에게도 말을 못하게 합니다. 문제를 회피하는 타입입니다. 문제를 피해 도망가는 것은 아주 나쁜 것입니다. 도망갔다가 돌아오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문제는 더 나쁘게 변합니다. 요나처럼 도망가면 풍랑도 만나고 물고기 뱃속에도 들어가고 나중에 울고불고 후회하게 됩니다 

셋째, 문제에 당당히 맞서는 타입니다.

문제가 발생하면 일단 믿는 사람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시험이라는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정 감당을 못하면 피할 길을 내신다고 하였습니다. 피할 길은 내가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열어주시기 까지 참고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고전 10:13절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그런데 우리들이 만나는 거의 많은 문제는 내 편에서 문제 자체를 없애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지혜에 속하는 문제입니다. 덕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런 문제는 대개 가까운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입니다. 진리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 경우 상대방이 나의 문제를 지적할 경우 내가 그렇게 안하면 문제 자체를 없애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약점이 있고 부족한 점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 것을 지적받으면 이것이 성령께서 나를 깨우치는 것이로구나 라고 판단하고 문제의 행동을 안 하면 문제 자체가 사라집니다.

옛말에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고 하였습니다.

문제 자체를 없애면 문제 삼을 것이 없어집니다. 이렇게 간단한 것을 우리가 잘 못합니다. 문제 자체는 그냥 두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니까 평생 안 되는 것입니다. 문제가 되는 그 원인을 없애버리십시오. 그렇게 하면 삶의 질이 업그레이드되고, 인격 또한 성숙해 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본을 따르는 것이고 여호와 하나님께 피하는 신앙의 지혜입니다.

다윗은 이와 같은 신앙의 자세를 가졌습니다.

그가 사울의 추적을 피하여 산으로 들로 굴속으로 이방 땅으로 도망 다녔지만,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고 사실은 그가 그런 곳으로 피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피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본문 시편 11:1절에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 

사실 팔레스타인은 피하여 숨을 곳이 산뿐입니다.

산에 가야 바위틈도 있고 굴도 있습니다. 산이 가장 안전한 곳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위험을 피하여 숨을 때 산으로 피합니다. 다윗이 처한 상황은 적들이 다윗을 향하여 숨어서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상황입니다 

11:3절에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라고 합니다.

이 말은 국가의 기강, 곧 법률과 질서(law and order)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국가의 법률과 질서가 지금 현재로서는 완전히 무너져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황하에서 다윗의 친구들은 다윗이 그곳에 남아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지적합니다. 마치 현대전에서 통신망이 파괴되어 명령하달이 안 되는 것과 같고, 쿠데타가 일어나 명령이 먹히지를 안는 상황과 같습니다. 반역이 일어나 왕이 명령을 내려도 따르는 자가 없는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이스라엘에는 지금 영적이고 도덕적인 터가 무너졌습니다. 아무도 의인을 알아주는 자가 없습니다 

사람들의 이러한 충고에 대한 다윗의 대답은

4절에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라고 합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보여주는 다윗의 말입니다. 그의 눈은 공격해 오는 적들에게서부터 이 세상 주관자이신 하나님에게로 향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을 통해 볼 때, 다윗은 하나님에 대한 이중적인 인식을 가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성전에 계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의 의로운 백성 중에 임재 하여 계심을 나타낸 것입니다.
   둘째, 여호와의 보좌가 하늘에 있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초월성(超越性)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하나님은 모든 인간보다 위대하시고 초월하여 계신 분임을 묘사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인식하에서 다윗은 위기 중에서도 오직 하나님께 피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중에 내재하여 계시는 동시에 모든 인간들을 초월하여 계시는 분으로서 그 어떠한 피난처보다도 가장 안전한 피난처가 되심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특히 여호와의 보좌가 하늘에 있다는 다윗의 인식은 위기 중에 그에게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보좌는 모든 인간을 심판하실 심판의 보좌가 되기 때문입니다(1:2;2:20).

미가 1:2절에 백성들아 너희는 다 들을지어다 땅과 거기에 있는 모든 것들아 자세히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증언하시되 곧 주께서 성전에서 그리하실 것이니라.”

2:20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그리고 다윗은 모든 상황을 하나님께서 보고 계신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

하나님께서 그 인생의 행위가 선한지 악한지 눈으로 살펴보시고 계십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공격할 때도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고, 내가 다른 사람에게 나쁘게 할 때도 하나님께서 보고 계십니다. 이러한 인식은 우리의 행동을 절제하게 하고 겸손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악을 카운트하고 계십니다. 의인의 선행과 인내도 카운터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 다 보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악인을 잡으시려고 그물을 예비하고 계십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소돔 고모라를 삼판하신 하나님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고라당이 모세를 대항할 때도 하나님께서 보관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이놈들을 어떻게 할까 하시다가 땅이 입을 벌려 삼키도록 하셨습니다. 다윗은 그런 하나님인 줄 알았기에 하나님께 피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자꾸 산으로 피하라고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유혹을 믿음으로 뿌리쳐야 합니다 

서구 사람들은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것을 너무 신뢰한 나머지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것이 아니면 세상은 질서가 무너지고 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무엇이나 조금만 비합리적이 되고 비과학적이 되면 불안해합니다. 과학을 신뢰합니다. 합리적인 것을 신뢰합니다. 합리성과 과학을 하나님보다 더 신뢰합니다. 저는 이것을 과학적 미신이라고 생각합니다. scientific superstition. 부적을 붙이고 무당을 찾아가고 점을 치는 것만 미신이 아닙니다. 합리적이 아니고 과학적이 아니면 믿지 못하는 것도 미신입니다 

우리들에 상당히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조금만 무엇이 이치에 안 맞아도 불안해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과학과 합리성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산으로 도망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하는 것은 사람들의 합리적인 생각입니다. 사람들이 하는 말은 모두가 그럴듯합니다. 일리가 있고 이치가 맞습니다. 남을 욕하는 말도 비난하는 말도 다 그럴 듯합니다. 이유도 있고 화낼 만도 합니다. 어려움을 만나면 도망가라고 하는 것, 그것도 팔레스타인 같은 지방에서 산으로 도망가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라고 합니다.

소설 도가니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장애아들을 성폭행한 비리를 끈질기게 추적 조사하는 일을 하는 인권센터에서 일하는 서유진에게 형사가 찾아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당신이 하는 짓이 너무... 뭐랄까요, 왜 쉬운 길 놔두고 그렇게 어렵게 사는지 답답하고 바보 같아요.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이나 바보짓은 말하자면, 예를 들어 처음 경찰이 되고 한 일년 반쯤만 하다가 마는 거잖아요. 스물몇살이 되면 없어져야 하는 거잖아요. 결혼하고 애 생기고 여기저기 부모님 아프시기 시작하면 고만해야 하는 것잖아요. 근데 이혼하고 애 아프고 부모님도 성치 않은 당신이 그걸 하고 있으니까.... 어이가 없어요. 더구나 남자도 아니고 여자가! 그런 순진한 생각으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건가...”

서유진이 대답합니다. “세상 같은 거 바꾸고 싶은 마음, 아버지 돌아가시면서 다 접었어요. 난 그들이 나를 바꾸지 못하게 하려고 싸우는 거예요.”

어쩌면 우리들의 싸움도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바꾸겠습니까. 세상이 나를 바꾸지 못하도록 싸우는 것입니다. 그 싸움이 신앙의 싸움입니다. 믿음의 싸움입니다. 이 싸움에서는 상식과 현실만을 바라보면 실망 합니다. 사람들의 말만 들으면 실망합니다.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천지와 만물을, 그리고 인간의 모든 도모를 배후에서 지켜보고 계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러니까 사냥꾼에게 쫓기는 새 같은 신세라고 하여도 두려워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하나님께 피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에서 정직한 자들이 되어 하나님을 뵈옵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에 여호와라는 말이 여섯 번 나옵니다.

그리고 지키신다.”는 말은 다섯 번 나옵니다. 그리고 너로혹은 너를이라는 말은 열한 번 나옵니다. 그러니까 본문의 총 주제는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본 시편은 하나님을 향한 순례자의 노래입니다.

본문의 나그네는 인생을 살면서 진정한 도움을 사모하며 눈을 들고 있습니다. 일상적인 일들을 피하여 살수는 없지만 그 삶에 지친 인생이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아 눈을 들고 있습니다. 여기서 눈을 들리라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살겠다는 태도입니다. 기도의 자세를 묘사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를 지키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 천지를 지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시편 기자는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고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고 하지 않고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고 합니다. 무슨 뜻일까요?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는 것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산의 신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셨기 때문이고,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시온 산에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루살렘에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산의 신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방인들도 이스라엘의 신은 산의 신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방인들이 말하기를 하나님은 산의 신이기 때문에 산에서는 능한 신이지만 평지에서는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전쟁을 하여도 산에서는 능하지만 평지에서는 약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의 시편 기자는 그런 이방인들의 생각을 의식이나 하는 듯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1-2절에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2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는 산의 신일 뿐 아니라 온 천지를 지으신 신이라고 고백합니다.
희랍신화에 보면 바람을 다스리는 신, 비를 다스리는 신, 전쟁의 신, 아름다움의 신 뭐 온갖 종류의 신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그런 신이 아니라 천지간의 모든 것을 지으신 신이십니다 

우리 예수님을 믿는 자들도 이런 갈등을 합니다.

진정 하나님께서 부와 명예와 권력과 건강과 행복까지도 다스리실까? 그런 것들이 과연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일까? 악귀를 쫓기 위해서는 굿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부적을 지니고 다녀야 하는 것이 아닐까? 고사를 지내야 사업이 잘되는 것이 아닐까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과연 그런 것에서 나의 도움이 올 것인가? 시편 기자는 단호히 그런 갈등을 불식시키고 있습니다.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로서 온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인생의 순례 길에서 때때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그 때 우리는 이런 고백을 하여야 합니다.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로서로다. 

그러면 이 고백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로부터 오기 때문에 두려울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이런 고백을 한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여기 내가 부족함이 없다는 말은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이기 때문에 내게 다른 필요한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마치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과 같습니다. 무화과나무의 열매가 없고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어도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고 기뻐하겠다는 신앙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지엽적인 신으로 믿으면 안 됩니다.

만약에 하나님을 지엽적인 신으로 믿으면 그것은 하나님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지엽적인 신으로 생각하면 예수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옛 이스라엘도 하나님 우상이 많았습니다.

복만 주는 신으로만 생각하면 하나님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병이나 고치는 하나님으로만 믿으면 하나님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라고 부른다고 다 하나님이 아닙니다. 교회라고 다 교회가 아닙니다. 지금 이 뉴욕 장안에도 많은 이단들이 들어와 있습니다.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으로 믿지 않으면 참 신앙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 때 하나님도 믿고 바알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신이기에 믿었고 바알은 가나안 땅에 풍년을 주관하는 신이기에 믿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형편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믿지만 직장 상사를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믿지만 경제적 어려움이 두렵습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병이 두렵습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불황이 두렵습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미래가 두렵습니다. 신앙인이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이 시편 기자에게도 이런 것들이 전혀 두렵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전혀 두렵지 않았다면 이런 시편을 짓지 않았을 것입니다. 두렵지만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그 두려움을 극복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저 먼 하늘에 계신 분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한 가운데 와 계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성전은 하나님께서 그들 중에 함께 계시다는 증거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한 가운데 와 계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중에 와 계셨을까요? 멀리 계시면 못 믿을까봐 가까이 계셨습니다. 지금도 우리 중에 와 계십니다. 임마누엘로 와 계십니다. 예수님의 별명이 임마누엘입니다.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십니다. 건축업자가 아니고, 컴퓨터를 만드신 분이 아니라 천지를 만드신 분이 나를 지키십니다 

 

by joseph1952 | 2011/11/10 05:55 | 2011년 주일설교 | 트랙백 | 덧글(8)

배부른 때가 위험하다

20111030일 주일설교

 

 

제목 : 배부른 때가 위험하다

본문 : 6:10-18

설교자 : 황상하 목사

1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를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11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차지하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차지하게 하사 네게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12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13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14 너희는 다른 신들 곧 네 사면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르지 말라./ 15 너희 중에 계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신즉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진노하사 너를 지면에서 멸절시키실까 두려워하노라./ 16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고/ 17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명령과 증거와 규례를 삼가 지키며/ 18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고 선량한 일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받고 그 땅에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겠다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아름다운 땅을 차지하리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으니라.

자본주의를 신봉하는 어떤 사업가가 자기 밑에서 일하는 직원에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여기 금덩어리 다섯 개가 있다. 내가 두 개를 가져왔다. 몇 개 남았냐? 세 개요. 내가 또 한 개를 뺏어왔다. 몇 개 남았냐? 두 개요. 그래, 이게 자본주의야. 내가 안 뺏어오면 다른 놈이 빼앗아 가는 거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먼저 가져가는 놈이 임자야. 사람들이 말로는 돈이 뭐 그리 중요하냐고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야. 세상에 돈보다 중요한 건 없어.” 자본주의의 폐단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요즘 도가니라는 소설이 베스트셀러입니다.

작가 공지영씨가 그 책에서 한 이야기입니다. 가진 자가 자기가 가진 것을 빼앗길까 두려워하는 에너지는, 가지지 못한 자가 그것을 빼앗고 싶어 하는 에너지의 두 배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가진 자는 가진 것의 쾌락과 가지지 못한 것의 공포 둘 다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진 자는 가진 것이 많을수록 그것을 빼앗으려고 하는 자에게 가하는 폭력이 무차별적이고 잔인하다고 하였습니다.

잠언 30:7-9절에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8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9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옛날에는 가난하여 도둑질 할 위험이 있었지만, 오늘날은 가난하여 도둑질 할 위험보다 배불러서 도둑질 할 위험이 훨씬 더 높습니다. 가난한 자는 돈에 대한 위력을 사실 잘 모릅니다.

옛날에 어린아이들에게 너 돈 있으면 뭐 할래?라고 물으면 사탕 사 먹을래요.’, ‘아이스크림 사 먹을래요.’라고 하였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돈 생기면 무엇하고 싶은지 모르겠습니다. 게임기를 사고 싶은 아이도 있겠고, 스마트폰을 사고 싶은 아이도 있을 것입니다. 어쨌건 아이는 옛날 아이나 현대 아이나 그 욕구가 단순합니다.

마찬가지로 가난한 사람의 욕구는 부자에 비해 매우 단순합니다.

양식 걱정 안 할 만큼만 돈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겨울에 따뜻하게 지낼 수 있는 난방비용 걱정 안 할 만큼만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여유가 있으면 집도 사고 싶고, 자동차도 사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들의 생각은 다릅니다.

부자들은 돈을 더 갖고 싶어 합니다. 왜냐하면 돈의 위력을 알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자는 돈으로 무엇을 살 수 있기 때문에 돈을 벌고 싶지만 부자는 돈의 위력을 알기 때문에 돈을 더 가지려고 합니다. 돈을 더 가지고 싶은 욕구가 얼마나 강한지 가난한 자의 돈이라도 빼앗고 싶어 합니다. 자기가 안 빼앗아 가면 어차피 다른 사람이 빼앗아갈 테니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먼저 빼앗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빼앗는다는 말은 좀 극단적인 표현이기는 하지만 그게 부자들의 마음이고 자본주의의 폐단입니다. 아합이 그랬고 다윗도 그랬습니다. 사실 부자들이 돈을 버는 것은 가난한자들을 상대로 버는 것입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가 경쟁을 하면 가난한 자는 거의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의 약점입니다. 자본주의의 이 약점을 가장 잘 이용하는 자들이 부자들입니다.

 

첫째, 재물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부자가 되는 방법은 성실하게 일해서 근검절약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발달한 사회에서는 성실한 노력만 가지고 큰 부자가 되기란 사실상 어렵습니다. 노동 집약적인 농경 사회에서는 성실하게 노력하고 근검절약 하는 사람이 부자가 될 수 있었지만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산업사회에서는 신속한 정보와 아이디어와 또 자본이 있어야 돈을 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부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재물을 주셔서 부자가 된다고 합니다.

본문 10-11절을 보십시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를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11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차지하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차지하게 하사 네게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땅을 갖게 된 것도, 집을 갖게 된 것도, 우물을 갖게 된 것도, 과수원을 갖게 된 것도, 심지어 집 안에 있는 모든 가구들까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땅이나 성읍이나 집이나 과수원이나 먹을 것을 풍족하게 갖게 된 것은 가만히 앉아서 저절로 갖게 된 것은 아닙니다. 전쟁을 하고 피를 흘리고 싸워서 얻은 것이고, 땀을 흘리고 성실하게 노력하여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셨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이 피를 흘리며 전쟁을 하여 빼앗고, 땀을 흘리고 노력하여 얻은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합니다. 대단히 중요한 사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점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치시려고 하시고, 이스라엘은 바로 그 점을 바로 배워서 알아야 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얻은 것이 아니고 피 흘리는 전쟁과 땀 흘리는 성실한 노동을 통해서 얻은 것이라도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을 알고 인정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광야 40년은 그 점을 가르치시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농사를 짓지 않고 만나를 먹었고, 사냥을 하지 않고 메추라기를 먹었습니다. 그것도 매일 매일 내려주셨습니다. 40년간 그런 경험을 통해서 먹을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농사짓지 않고 먹던 만나가 그칩니다.

가나안 땅에서는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하고 길쌈을 해야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피 흘리는 전쟁과 땀 흘리는 노동을 통해서 얻게 될 모든 재물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점입니다. 여기에 대한 오해가 없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시고 또한 강조하여 가르치셨습니다. 만나는 수고 하지 않아도 그냥 주셨지만 가나안 땅에서는 수고해야 주십니다. 그냥 주신 만나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수고하여 얻은 것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위험이 있습니다. 만나를 얻어먹을 때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인정하고 믿었지만 농사짓고 목축하고 장사하여 얻은 소득은 내가 노력하여 얻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8:17-18절에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18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농사지을 힘을 주셨고, 목축할 힘도 주셨고, 전쟁할 능력도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수고 하여 얻은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누리는 혜택, 이 사회에서 누리는 혜택, 국가에서 누리는 혜택, 공부할 수 있는 머리, 노동할 수 있는 힘, 비즈니스 할 수 있는 지혜, 활동할 수 있는 건강 등 이 모두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통해서 어떤 이익이나 소득을 얻어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성경은 그 점을 우리에게 강조하여 가르칩니다. 우리는 그 점을 배우고 인정하고 믿어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거보다 좀 더 잘 삽니다.

어떤 사람들은 잘 살게 된 것이 자기의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조상 덕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얼마나 풍족한지 모릅니다. 아마 모르긴 해도 여러분의 집 냉장고가 텅 비어 있는 집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옷장마다 옷들이 가득하고, 신발장에 신을 다 둘 수 없어서 이곳저곳에 신발이 쌓여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모든 것이 넘쳐나고 풍족합니다.

 

둘째, 배부른 때가 위험합니다.

배고픈 사람은 도둑질을 해도 빵을 훔칩니다. 그러나 배부른 사람은 배고픈 사람을 죽이고 그가 가진 것을 빼앗습니다. 죄는 가난한 사람이 지은 죄나 부자가 지은 죄나 다 마찬가지이지만, 가난한 사람은 지은 죄 때문에 망하는 경우가 많고, 부자는 지은 죄로 인하여 더 부자가 됩니다. 부자가 되어 위험한 것이 많지만 무엇보다 가장 위험한 것은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세상에서 도와 줄 사람이 없으니까 하나님을 찾게 되고 부자는 돈이 모든 것을 해결 해 준다고 생각하니까 하나님의 필요를 못 느끼게 됩니다.

 

잠언 30:9절에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돈 많고 배부르고 건강한 사람이 기도할 가능성은 정말 희박합니다. 그러나 가난하고 배고프고 몸이 병들면 기도하게 됩니다. 배부르면 하나님을 잊어버릴 가능성이 높고, 배고프면 하나님을 찾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되더라도 부자 되는 것을 원하십니까, 아니면 가난하고 병들게 되어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게 되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게 되더라도 부자 되는 것이 좋다고 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게 되기 위하여 일부러 가난하게 되고 몸을 병들게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것은 고행주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그렇게 다스리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그렇게 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딜레마입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기도하기를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사람이 나쁘지 않아도 부 자체가 위험합니다. 그 이유는 재물이 하나님의 자리에 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12:16-21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이 부자의 경우, 부정축재를 했다거나 사기를 쳤다거나 도둑질을 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에게 잘못이 있다면 지나치게 인색했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었지만 하나님께 대하여는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부한 재물입니다. 사람이 특별히 나쁘지 않고 악한 일을 하지 않아도 부가 축적되면 위험합니다. 부자는 재물의 힘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게 되고, 재물의 가치를 알기 때문에 그것을 빼앗길까 남을 의심하고, 재물의 위력을 알기 때문에 영혼까지 재물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래서 본문은 배부를 때 조심하라고 합니다.

무엇을 조심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잊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어떤 하나님입니까?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는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내신 것은 그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당신을 섬기며 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나아가서는 온 세상에 하나님을 알리고 전하도록 하기 위해서 인도하여 내셨습니다. 하나님을 세상에 알리려면 세상의 권세와 명예와 재물을 의지하여 살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여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만 의지하여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만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만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세상에 하나님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전도요 선교입니다.

개인이나 교회나 돈이 많으면 위험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살 때 가난하고 힘들 때 조심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부하고 배부를 때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미국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 문제가 있지만 가장 핵심이 되는 문제는 배부른 것이 문제입니다. 한국 교회의 문제도 배부른 것이 문제입니다. 배고프면 싸우지 않습니다. 싸움은 배부른 자들이 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교회는 싸우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돈 많은 교회는 안 싸우는 교회가 거의 없습니다. 싸우는 교회들의 공통된 특징은 돈이나 재물이 많은 것입니다.

재물이 많고 배부르면 하나님을 잊어버릴 위험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염려입니다. 신기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려하신 일은 반드시 인간에게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공연히 염려하시거나 걱정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부자 되고 배부르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이 누구냐,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모른다거나 하나님이 누구냐고 하는 것이 얼마큼 나쁠까요?

지난 주간에 뉴욕교협총회가 있었는데, 그 동영상을 보면서 참담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안하무인(眼下無人)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이나 행동이 무례하여 자기 눈 아래 사람이 없는 것처럼 행동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뉴욕교협총회는 안하무신(眼下無神), 그들 눈앞에 하나님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회의를 진행하고 동조하는 사람들이나 회원들 중 대다수가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경찰관들이 회의장에 들어가 앉아 있고, 한 경찰이 앞에 나가 마이크를 들고 목사님들에게 교훈과 주의를 주었습니다. 임원들이 미리 경찰을 불렀다고 합니다. 얼마나 창피하고 부끄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도덕과 윤리와 정의와 질서 같은 것을 무시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마음껏 담대하게 부정을 저지릅니다. 그러고도 일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부하고 배불러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되면 양심이 마비되어 온갖 악을 행하면서도 뻔뻔하고 교만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자기 자신이 곧 하나님입니다. 자기를 대항하거나 반대하는 사람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을 절대시 하고 우상화 하는 사람은 반드시 권력과 명예와 재물을 탐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한 분을 잊어버리게 되면 섬겨야 될 신이 많아집니다. 재물도 섬겨야 하고 명예도 섬겨야 하고 권력도 섬겨야 합니다. 그것은 곧 자기 자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세상 사람들의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14절에 너희는 다른 신들 곧 네 사면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르지 말라.

오늘날 기독교의 문제는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 사람들의 살아가는 방법을 따르고 배우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배워갑니다. 자본주의도 배우고, 자유주의도 배우고, 실존주의도 배우고, 포스트모더니즘도 배우고, 온갖 세상의 가치관과 문화를 배웁니다. 교회가 세상을 따릅니다. 세상이 하는 방식 그대로 따라 합니다. 세상은 재물을 섬깁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만 섬겨야 합니다. 재물과 권력과 명예와 인기를 탐하여 싸웁니다. 온갖 권모와 술수를 부립니다. 이런 자들에 대하여 하나님은 질투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15-16절을 보십시다.

너희 중에 계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신즉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진노하사 너를 지면에서 멸절시키실까 두려워하노라./ 16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고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교협이 모여서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을 했습니다. 교회가 그런 일을 할 수가 있고, 여러분의 가정에서도 하나님을 모독 하는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모세를 원망한 사건을 하나님을 시험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옛날에 짓궂은 남자 아이들이 여자아이들을 해코지 하고 도망가면서 나 잡아 봐라!라고 하면서 여자아이들을 약 올렸습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하나님을 약 올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면 벌 한 번 내려 보시오, 라고 하는 형국입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행하는 모든 행위는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폭언 폭행 불의 불법 거짓말 사기 모함 모든 악행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다 배불러서 짓게 되는 죄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은 저주와 멸망을 자초하는 행위입니다.

 

셋째, 복 받는 길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17-18절을 보십시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명령과 증거와 규례를 삼가 지키며/ 18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고 선량한 일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받고 그 땅에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겠다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아름다운 땅을 차지하리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으니라.

명령과 증거와 규례는 모세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제반 명령과 규례. 법도를 가리키는 삼중 표현입니다. 조심하여 하나님을 잊지 않는 구체적인 행동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여 지키는 것입니다. 악하고 나쁜 행동을 안 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정직하고 선량한 일을 행해야 합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악하고 나쁜 행동을 안했다는 것으로 만족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 정도의 수준으로는 안 됩니다. 정직하고 선량한 일을 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 조건이 있습니다. 자기가 생각하기에 정직하고 선량한 일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정직하고 선량한 일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고 선량한 일을 행해야 합니다.

솔로몬은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왕상 11:33절에 이는 그들이 나를 버리고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과 모압의 신 그모스와 암몬 자손의 신 밀곰을 경배하며 그의 아버지 다윗이 행함 같지 아니하여 내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나 보기에 정직한 일과 내 법도와 내 율례를 행하지 아니함이니라.” 솔로몬은 온갖 이방 신들을 다 들여와 섬겼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그는 정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둘로 쪼개어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갈라지게 하셨습니다.

우리들도 사람보기에는 정직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정직해야 합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예배드리는 것, 헌상하는 것, 기도드리는 것, 찬양 드리는 것, 구제하는 것,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것, 직장생활, 비즈니스, 학교생활, 이웃과의 관계, 가족과의 관계, 교우들과의 관계, 국민의 의무, 교인의 의무, 가족의 의무 등 이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정직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물질적인 복은 이미 앞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땅을 주시고, 성읍을 주시고, 온갖 가구와 생활 용품이 구비한 집을 주시고, 포도원을 주시고, 또 배불리 먹게 해 주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신 복으로 인하여 배부르게 될 때가 위험한 때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조심하여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곳에서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순종하여 지키면 복을 받고 아름다운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되리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으면 그 땅에서 쫓겨나게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먹을 것이 풍족할 때 조심하십시오. 입을 옷이 넉넉할 때 조심하십시오. 하나님을 잊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여 이곳 미국에 오게 하시고 영주권을 얻게 하시고 잡을 얻게 하시고 아내를 주시고 남편을 주시고 가족을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짓지 아니한 집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농사짓지 아니한 식물을 먹습니다. 우리가 만들지 않은 옷을 입고 신발을 신습니다. 감사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옛날 종으로 살 때를 기억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감사해야 하듯이 우리들도 옛날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복 받는 삶이고 복을 누리는 삶입니다. 그렇게 살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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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seph1952 | 2011/11/10 05:45 | 2011년 주일설교 | 트랙백 | 덧글(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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